운동의 씨앗을 만들고, 퍼뜨리다

운동의 문을 열어 불을 지핀 그들의 삶을 살펴본다.

김광제(金光濟, 1866~1920)

김광제

1866년 7월 1일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면 평리에서 출생했다. 1888년부터 병조 효력부위에 제수되어, 통훈대부 훈련원 검정의 관직을 지냈다. 1902년 10월에는 정3품 통정대부를 맡고 이후 호남시찰사 및 동래경무관을 역임했다. 그는 1905년 친일 및 내정 부패 탄핵 상소문을 올려 고군산도로 유배당하고 만다. 이후 무고함이 밝혀져 2개월 만에 특별사면 되었다.

김광제는 대구로 내려가 인쇄소 겸 출판사인 광문사를 건립해, 출판을 통하여 한국 민족에게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고 계몽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07년 문회를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의에서 국채 1,300만 원을 갚자는 서상돈의 제안에 참석한 회원들이 모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사장인 김광제는 발기 연설을 한 뒤 자신의 담뱃대, 담뱃갑을 버리고 3개월치 담뱃값 60전과 의연금 10원을 냈다. 이후 서상돈을 포함한 이들과 함께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작성해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취지서에는 전 국민이 3개월간 금연한 돈으로 일본에서 차관한 1,300만 원을 갚고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주성을 찾자는 내용을 담았다. 1907년 2월 21일 대구 읍성 서문 밖 북후정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군민대회를 열고 수창사에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를 설치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담배와 담뱃갑을 던져버리고, 거지, 마부, 백정 노비까지 의연하여 첫날 모인 돈이 500원이 넘었다.

국채보상운동 이후 대한자강회·대한협회 등 정치 단체에 참여하고, 교육단체를 세워 국민 계몽을 위한 순회 강연을 다녔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워지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김광제는 제2의 3.1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귀국했지만, 일제에 발각되어 결국 실패하고 만다.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각종 사회단체가 결성되고, 민족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김광제는 조선노동대회 발기회를 주도하고 ‘노동단취지서’를 발표하는 등 노동자 권익 활동에 나섰다. 1920년 4월 11일 조선노동공제회 창립 이후 그의 주도로 노동대회도 조직되었다. 전국 순회 강연을 다니며 왕성한 활동을 해오던 김광제는 같은 해 7월 24일 경남 마산에서 영면하였다.

1990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