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그 정신을 잇다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잇는 금 모으기 운동과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과정을 살펴본다.

금 모으기 운동

대구 금 모으기 운동 당시 참여 사진
대구 금 모으기 운동 당시 참여 사진
(김영환님 기증)

1997년 외환위기 사태로 국가가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자 국민이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쳤다. 대구에서는 민관협력 시민운동 네트워크인 대구사랑운동시민회의를 중심으로 ‘제2국채보상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대구시와 시민회의가 협의하여 1997년 12월 28일 금 모으기 운동을 추진해 당일 금 8kg(약 1억 5천만 원 상당)을 모았다. 1998년 1월에는 160여 명의 기관·단체장이 함께하는 ‘장롱 속 금 모으기 운동’ 간담회를 열었다.

외환위기 여파로 늘어나는 어려운 이웃을 지원하기 위해 대구시청 민원실에서는 전국 최초로 ‘이웃사랑창구’를 개설하였다.

‘이웃사랑창구’는 갑작스러운 실직 등으로 생계가 어려운 가정에 소정의 생계비와 무료치료, 쌀 무상공급, 취업알선 등의 서비스를 지원했다. 외환위기로 파산한 업체의 재고 물품이나 가정·직장에서 사용하지 않는 물품 등을 물물교환하거나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토요알뜰장터도 열어 다양한 재활용 축제를 열었다.

대구시와 대구상공회의소, 지역대학교에서는 국채보상운동 기념사업의 목적으로 기념사업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등을 조성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대구 금 모으기 운동은 약 10만 3천 명이 참여하면서 12톤 452kg의 금을 모을 수 있었다.

대구 금 모으기 운동 당시 참여 사진
(김영환님 기증)
대구 금 모으기 운동 당시 판매위탁증서
(조연자님 기증)
대구 금 모으기 운동 당시 위탁 증서
(이성광님 기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다

국채보상운동은 신분의 높고 낮음 없이 전 국민의 약 25%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최초의 국민모금운동이자 절약운동이었다. 국채보상운동 이후 중국, 멕시코 등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여러 나라에서도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운동이 일어났다.
국채보상운동은 다른 운동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온 국민이 신분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참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나라의 빚을 갚기 위해 시작된 운동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으로 재현되었다. 이처럼 한국에서 발생한 외채 갚기 운동은 국민의 권리보다는 국민된 도리와 책임을 강조하면서 만들어졌다.

2015년, 운동의 아카이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같은 해 5월, ‘국채보상운동 아카이브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가 발족하여 국내 각지에 흩어진 취지문, 발기문, 일제 통감부 문서, 언론 아카이브 등을 수집하고 정리한 뒤, 문화재청을 통해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했다.

유네스코 본부에서 발급한 국채보상운동 아카이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
유네스코 본부에서 발급한 국채보상운동 아카이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

2017년 10월,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조선통신사 아카이브와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되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국채보상운동 아카이브는 총 2,475건으로 손으로 직접 쓴 수기록 자료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나 운동의 문제점 등을 가감없이 실은 신문 자료가 포함되어있다.
35년간의 일본 식민지와 3년간의 한국전쟁 속에도 원본이 그대로 보존되어 그 자체로도 역사적 실체가 된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1주년을 기념해 유네스코 특별전시관을 열었다. 또한, 운동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대구시에서는 1907년 대구에서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월 21일을 새로운 ‘대구시민의 날’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