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씨앗을 만들고, 퍼뜨리다

운동의 문을 열어 불을 지핀 그들의 삶을 살펴본다.

서상돈(徐相敦, 1850~1913)

서상돈

1850년 10월 17일 경상북도 김산군 마잠(현 김천시 지좌동)에서 출생했다. 천주교에 입교한 고조부를 따라 친척들이 모두 입교하면서, 그 또한 독실한 천주교인이 되었다. 천주교 박해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를 모면하기 위해 이사 다니다 대구에 정착했다. 어린 시절 상점의 심부름꾼으로 돈을 벌던 경험을 바탕으로 보부상을 시작해 이후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그는 교회 활동을 하면서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대구에 학당을 설립할 때 재정적인 지원과 학교 운영을 도왔다.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도 활약했으며, 1906년 김광제, 정규옥 등과 광문사를 설립했다. 1907년 1월 29일, 특별회의에서 국채 1,300만 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를 발의했다. 서상돈은 즉석에서 800원의 의연금을 내놓았고, 200여 명 회원의 만장일치를 이끌어냈다. 그를 포함한 대동광문회 회원이 함께 작성한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는 신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가 황제뿐 아니라 고관, 노동자, 농민, 부녀자, 걸인 등까지 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활발히 전개되던 운동이 일본의 탄압으로 좌초되자 서상돈은 사업 활동에 전념하면서 실업 진흥을 통해 민족 실력양성에 힘썼다. 1913년 6월 30일, 64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1999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