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씨앗을 만들고, 퍼뜨리다

운동의 문을 열어 불을 지핀 그들의 삶을 살펴본다.

양기탁(梁起鐸, 1871~1938)

양기탁

1871년 4월 2일 평안남도 평양 소천에서 출생했다. 그는 외국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며 일찍부터 서양문물을 접했다. 1898년 시민, 단체회원, 정부 관료 등이 참여한 대중집회, 만민공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피체되었다. 출옥 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힌 뒤 33세에 귀국하였다.

양기탁은 외세의 침략 사실을 국민과 해외에 알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04년 7월 베델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무가 되어 <대한매일신보>를 함께 창간했다. 영국인의 명의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일본 검열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운동을 알리고, 의연금을 모금하는 데 힘썼다. 신문사 내 설치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총무로 선출되기도 했다. 일본은 총무직을 맡고 있던 양기탁을 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혐의를 씌어 구속했다. 함께 누명을 썼던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이 허위로 조작된 사건임을 증명하면서 2개월 만에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1907년 4월에는 안창호와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1909년 12월 만주에 신흥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 이후 여러 차례 투옥되고, 탈출을 감행하는 독립운동 생활을 이어나갔다. 1930년 상해로 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3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1935년까지 재임했다. 오랜 망명 생활과 과로로 병을 얻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요양하였으나 1938년 4월 19일 영면하였다.

1962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